충주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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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주사고(忠州史庫) 사고(史庫)는 고려 후기부터 조선 중기까지 충청북도 충주지역에 왕실의 중요한 서책과 문서를 보관하였던 창고다.
충주는 관방(關防)으로서 중요한 요충지이고 한강의 수운(水運)을 이용한 교통의 요지로 외적의 방어에 용이하여 일찍이 사고가 설치되었다. 사고 관리는 충청도관찰사와 충주목사의 관할 아래 수호관(守護官) 5원과 별색(別色)·호장(戶長)·기관(記官)·고직(庫直) 각 1원을 두어 전담 관리하게 하였다.
1227년(고종 14)... 2020.06.15 -
증기기관차의 추억 충주급수탑 충주시 봉방동행정복지센터 앞 봉방소공원에는 1928년 충북선 철도가 개설되면서 건립된 것으로 보이는 높이 12m, 폭 3m 규모의 충주급수탑이 있다. 이 급수탑은 석탄으로 물을 끓일 때 발생하는 증기로 움직이는 증기기관차에 물을 공급하기 위한 시설이다.
우리나라에서의 증기기관차는 1899년 경인선 철도 개통과 함께 도입됐고, 일제강점기 때는 식량과 자원수탈, 대륙교통로 확보를 위해 이용되었다. 해방 이후 철도의 동력 근대화가 추진... 2020.06.12 -
추억이 되어가는 공중전화 공중전화는 전화를 구입하기 어려운 저소득계층을 위한 보편적 서비스 성격을 가질 뿐 아니라 이동통신서비스가 보편화되기 전에는 이동 중인 사람을 전화망에 연결하는 유일한 통신수단이었다.
우리나라에서는 1981년 말 약 6만 대에 불과했던 공중전화가 대량공급을 통해 1990년 말까지 23만 7,074대로 증가되었다. 우리나라 인구 1,000명당 공중전화 보급률은 1990년 말 현재 5.5대로 이는 세계적으로도 높은 수준이었다. 이제 가입전화 적체 해... 2020.06.12 -
첫 사립고 ‘충주한림디자인고등학교’ 1961년 12월 30일 학교법인 한림학원(이사장 임병구) 설립 인가를 받았으며, 1962년 3월 17일 충주시 교현동 490번지에 충주공업고등학교(교장 김영호, 현재의 충주공고와는 다른 학교임)로 설립 인가를 받고, 같은 해 4월 16일에 개교하였다.
1966년 3월 16일에 학칙을 변경하여 충주공업고등학교를 충주여자상업고등학교로 개칭하였다. 1974년 12월 2일에는 24학급의 학급 증설 인가를 받았으며, 1976년 2월 28일에는 교육법 107조 4항에 따라 산업체 특별학... 2020.06.03 -
첫 중학교 ‘충주중학교’ 충주중학교는 호암동 192번지에 설립된 충주 최초의 중학교이다. 1940년 4월 1일 5년제 충주중학교 설립 인가를 받았으며 같은 해 4월 18일 개교하였다.
1951년 8월 1일 학제 개편으로 중학교와 고등학교를 분리하였으며, 1976년에는 27학급 증설 인가를 받았다.
1969년부터 중학교 무시험 입학제가 실시되면서 중학교 진학 학생이 늘었다. 1996년도에는 중학교 진학률이 99.3%로 올라 갔다. 1985년부터는 농어촌지역부터 중학교 무상 의무교육... 2020.06.03 -
<모밀꽃>의 시인 정호승 정호승 시인은 1916년 충주시 중앙탑면 창동리에서 태어났으며, 본명은 정영택(鄭英澤)이다. 1929년 충주공립보통학교(현 충주교현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서울 중앙고등보통학교에 진학하였으나 재학 중 좌익서적을 읽다가 발각되어 정학처분을 몇 차례 당하고는 학업을 중단했다. 한말인 1893년(고종 30)에 미국박람회 출품사무대원에 임명되어 한국은 전 세계에 홍보한 정경원은 시인의 증조부가 된다.
1935년 서울에서 조선문학사를 열어 문예... 2020.06.01 -
미국박람회 참석 조선을 알린 정경원 충주 출신으로 사라진 근현대 인물 중에 조선 말기에 문신을 지낸 정경원(1851∼1898년)이 있다. 송강 정철의 후손으로 본관은 연일(延日)이고 자는 염조(念祖)이다. 정해안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1890년(고종 27)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그해 부교리에 제수되고, 이듬해 천진주재 독리 황기연의 종사관이 되어 청나라에 다녀왔다. 이어 겸사서를 거쳐 시강원문학, 성균관대사성, 참의내무부사, 이조참의 등을 역임하였다.
1893년... 2020.06.01 -
관아공원 청령헌(淸寧軒) 옛 사진 충주 청령헌은 관아공원(1983년에 이름 붙여짐)에 있는 조선시대 관아 충주목의 동헌으로 당시 목사가 이곳에서 집무를 보던 곳이다. 1870년(고종 7년) 화재로 타버린 것을 같은 해 10월 당시 목사로 있던 조병로가 금봉산 창룡사를 헐어서 다시 세웠다고 한다.
그 후 청령헌 내부를 개조해 중원군 청사로 쓰다가 1983년에 군청이 금릉동으로 옮겨가면서 복원하여 지금에 이른다. 건물은 앞면 7칸, 옆면 4칸 규모로,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여덟 팔(... 2020.05.22 -
전화번호부로 본 1962년 충주 충주에서 처음 전화번호부가 만들어진 것은 1962년 충주우체국 감수로 만들어졌다.
이 때만 해도 전화가 귀하고 대중화되지 않은 때여서 전화가 많지 않아서 충주 시내(읍면 제외)에 587대 정도에 불과했다. 서민은 물론 사업자라고 해도 말 그대로 작은 가게는 전화가 없는 경우가 대부분이어서 전화 숫자가 사업체 숫자와 일치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이 충주전화번호부를 통해 60년대 초반의 잘나가는 업종을 살펴볼 수 있다. 예나지나 ... 2020.05.22 -
칠금동의 유래 ‘칠금리 자랑비’ 칠금리 자랑비는 19992년 탄금축구장 대로변에 세워졌다. 자랑비에는 칠금리는 칠지, 신촌, 금대마을로 이루어져 있고, 남한강과 열두대의 수려함을 담고 있는 지역으로 예로부터 악성 우륵선생의 청아한 가얏고 소리가 퍼지고 임진왜란 때 신립과 팔천 장병의 백절불굴의 정신이 살아 숨 쉬는 곳이라고 적어 자랑스러운 마을이라는 뜻을 비문에 담고 있다.
칠금리는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 때 금대리, 신촌리, 칠지리, 능암리, 봉계동의 일부를 ... 2020.05.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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