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주고구려비전시관
아! 고구려
충주고구려비전시관
충주는 계립령과 죽령, 남한강 등이 있어 육로와 수로의 요지였다.
무기와 생활 도구는 물론, 문화 발전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질 좋은 철이 생산됐다.
충주를 손에 넣는 나라가 삼국 통일의 교두보를 확보하는 셈이었다. 고구려는 70년 넘게 충주를 지배했으나 신라에게 빼앗겼고, 신라가 마침내 삼국을 통일했다.
고구려의 충주 점령을 상징하는 충주 고구려비가 강한 나라 고구려의 기상을 품고 충주 땅에 서 있다.

소개

선돌마을에서 찾은 국보 비석
돌이 하나 서 있어 마을 이름이 선돌마을이었다. 한자로 옮기니 입석마을이 됐을 뿐, 그 돌이 무엇인지 아는 사람도 관심을 두는 이도 없었다.
설화에 따르면 조선 시대 숙종이 이곳을 지날 때 마을에 사는 전의 이씨에게 두 돌기둥을 기준으로 안쪽의 산과 밭을 하사했는데, 돌기둥 하나가 충주 고구려비다. 숙종도 이 비석이 무엇 인지 모르고 흔한 돌기둥으로 여긴 것이다.
그 돌기둥은 고구려 장수왕 때 남진 정책으로 충주가 고구려 땅이 된 뒤에 세운 고구려비다. 판독 가능한 비문만 모아도 그동안 공백으로 남았던 충주 지역에서 삼국의 관계를 알 수 있는 중요한 자료다. 충주 고구려비는 고구려의 한강 이남 진출을 입증하는 유물이자, 우리나라에 유일하게 남은 고구려 비석이다. 국보 205호로 지정되었으며, 현재 충주 고구려비전시관에 있다.
충주에서 고구려를 만나다
돌충주고구려비전시관 앞에 고구려의 상징물인 삼족오 조형물이 있다. 태양에 산다는 전설의 새 삼족오는 고구려 고분벽화에 나오며, 강인한 고구려의 기상을 나타낸다. 고구려의 기상은 충주고구려비전시관 안에서도 만날 수 있다. 전시관으로 들어가다 보면 벽화를 재현한 전시물을 따라 복도를 지나는데, 말을 타고 달리는 ‘개마무사’ 조형물이 여행자를 반긴다
개마무사는 고구려의 주력부대였다. ‘개마’는 말에 갑옷을 입힌 것을 말하며, 그 말을 탄 무사와 기병대를 개마무사라고 불렀다. 개마무사는 앞장서서 쳐들어가는 돌격대이자, 마지막 방어책이었다. 화살도 뚫지 못하고 창날에도 끄떡없는 철갑옷을 입은 개마무사는 승전의 수호신이었다. 광개토대왕이 영토를 확장할 때 개마무사가 5만에 이르렀다고 한다.
전시관 통로 벽에 남진 정책을 중심으로 한 고구려의 역사, 당시 주변 국가와 관계 등이 적힌 기록이 여행자의 발걸음을 붙잡는다. 한 걸음 한 걸음 지날 때마다 고구려에 대해 알게 된다. 고구려는 알면 알수록 강한 나라였다. 드디어 강한 나라 고구려의 최고 상징물, 충주 고구려비를 만난다.

고구려가 지배한 충주 역사 70여 년
충주 고구려비를 건립한 연도를 두고 의견이 분분하다. 문자명왕(재위 491~519년) 시절인 495년 전후, 장수왕이 남진 정책을 펼치며 충주를 점령한 뒤 등 두 가지 설에 무게가 실린다.
충주는 철을 생산한 고장이며, 남북을 왕래할 때 계립령과 죽령 같은 육로와 남한강을 이용한 수로 등이 있는 교통의 요지였다. 이에 충주는 삼국의 각축장이었다. 삼국이 군웅할거 하던 시절 충주 지역을 점령한 주인은 백제, 고구려, 신라 순으로 바뀌었다.
백제 근초고왕(재위 346~375년)이 지금의 경기도와 충청도, 전라도, 낙동강 중류 지역, 강원도, 황해도 일부까지 포함하는 영토를 확보했다. 그러나 백제는 5세기 말에 이르러 광개토대왕(재위391~413년)이 한강 유역에 진출하고, 장수왕(재위 413~491년)이 남진 정책을 펼침에 따라 475년 한강 유역을 잃는다. 당시 전투에서 개로왕까지 죽는다.
충주 안림동에 어림이라는 마을이 있는데, 그 마을이 이궁지라는 설이 있다. 개로왕(재위455~475년)이 죽기 전에 위기를 느끼고 한성에서 충주(안림동)로 도읍을 옮기려고 궁궐을 지었으나, 천도하지 못하고 죽었다는 것이다. 개로왕의 아들 문주가 잠시 충주에서 머물렀다가 공주(웅진)에 수도를 정했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고구려의 남진 정책에 위기를 느낀 신라와 백제는 고구려에 대항하기 위해 나제동맹을 맺었다. 하지만 고구려의 남진은 계속됐고, 조령과 죽령, 평해, 영덕으로 이어지는 선까지 영토를 확장했다. 고구려는 충주를 장악한 뒤 신라 왕을 매금으로 칭하는 등 신라와 관계에서 우위를 과시하는 한편, 충주 지역을 삼국 통합을 위한 남방 기지로 삼았다. 이는 충주를 점령한 뒤 부도의 성격을 띠는 국원성으로 삼은 점이나 충주 고구려비를 세운 것을 통해 알 수 있다.
이후에 충주 지방은 고구려의 영토가 되어 70여 년간 고구려의 지배를 받는다. 이후 신라 진흥왕 때인 6세기 중엽에 고구려는 신라에게 충주를 빼앗긴다. 고구려는 이 지역을 탈환하기 위해 지속적인 노력을 펼친다. 영양왕(재위 590~618년) 때 온달 장군이 전쟁에 나서면서 “계립현과 죽령 이북의 땅을 우리 것으로 회복하지 않으면 돌아오지 않겠다”는 말을 남겼다고 전한다. 642년(선덕여왕 11) 김춘추가 백제를 치기 위해 고구려에 입국, 구원병을 요청했을 때 보장왕(재위 642~668년)은 “네가 죽령 서북의 땅을 돌려준다면 원병을 보내겠다”는 말을 남겼다고도 한다.
현재 입석마을 주변에는 용전리, 봉황리, 천룡산, 을궁산, 태자뜰 등 고대 왕실이나 최고 지배층을 연상케 하는 지명이 있다. 충주 고구려비가 세워진 고구려의 최전선이자 고구려 제2의 도성이던 국원성의 명맥이 이어지는 것이다.
삼국은 전성기에 충주를 손에 넣었다
백제의 전성기
백제는 근초고왕 때 비약적으로 발전했다. 근초고왕은 정복 사업을 펼쳤다. 남으로는 마한 지역을 정복하면서 전라도와 남해안까지 그 세력이 이르렀고, 낙동강 유역에 자리잡은 가야에 영향력을 행사했다. 고구려를 공격해서 고국원왕(재위 331~371년)을 죽이기도 했다. 당시 백제는 지금의 경기도와 충청도, 전라도, 낙동강 중류 지역, 강원도, 황해도 일부까지 포함하는 영토를 확보했다. 한편 동진과 외교를 맺고 중국의 랴오시와 산둥, 일본의 규슈까지 진출해 상업망을 형성하는 등 대외적인 활동도 펼쳤다.
고구려의 전성기
광개토대왕은 영토 확장 전쟁으로 한강 유역까지 진출했으며, 장수왕은 남진 정책을 펴 충주를 점령하고 조령과 죽령, 평해, 영덕으로 이어지는 선까지 영토를 확장했다. 고구려의 남진 정책에 위기를 느낀 신라와 백제는 나제동맹을 맺었지만, 고구려의 남진은 계속됐다. 고구려는 충주를 장악한 뒤 신라 왕을 매금으로 칭하는 등 신라와 관계에서 우위를 과시하는 한편, 충주 지역을 삼국 통합을 위한 남방 기지로 삼았다. 이는 충주를 점령한 뒤 부도의 성격을 띠는 국원성으로 삼고, 중앙탑면에 충주 고구려비를 세운 것을 통해 알 수 있다.
신라의 전성기
백제가 550년(진흥왕 11)에 고구려의 도살성(지금의 천안)을 빼앗자, 고구려는 백제의 금현성(지금의 세종시 전의면·전동면 일대)을 함락했다. 이때 신라는 양국 군사들이 피로한 틈을 타 도살성과 금현성을 모두 빼앗고, 군사 1000명을 배치했다. 신라가 한강 유역으로 진출할 교두보를 마련한 셈이다. 이어 551년에 낭성(충주)을 돌아보고 한강 상류 지역으로 진출, 죽령 이북 고현 이남의 10개 군을 빼앗았다. 557년(진흥왕 18) 소경(국원소경)을 설치하고, 이듬해 경주의 부호들과 귀족 자제들을 충주로 이주시켰다. 충주는 신라의 5소경 중 가장 먼저 설치되었으며, 정치와 군사, 문화의 중심지 역할을 맡았다. 문무왕 때는 국원성을 축성하고, 경덕왕 때는 중원경으로 이름을 바꿨다



- 1충주고구려비
- 2충주고구려비전시관 개마무사 조형물
- 3충주고구려비전시관의 영상 전시물
추천! 하루여행코스
- 출발
- 충주세계무술공원
- 탄금대
- 충주 창동리 마애여래상
- 중앙탑사적공원
- 충주고구려비전시관
- 충주고구려천문과학관
오시는길
여행정보
대중교통 | 충주공용버스터미널 시내버스 정류장에서 400, 411, 412, 413번 버스 타고 입석삼거리 하차. |
---|---|
자가운전 | 중부내륙고속도로 북충주 IC로 나와서 가금 방면 감노로 이용, 북충주 IC에서 충주고구려비전시관까지 약 6km. |
맛집 |
|
숙소 |
|
안내
- 관람시간 : 오전9시~ 오후6시
- 휴관일 : 매주 월요일, 1월 1일, 설날.추석 당일
- 관람료 : 무료
충주고구려비전시관
- 충주시 감노로 2319
- Tel.043)850-7301
《충주시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