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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주 지명의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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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주는 찬란한 중원문화의 중심지로서 고대부터 통일신라에 이르기까지 우리지역을 차지하기 위해 치열한 각축을 벌였던 곳이기도 합니다.
대한민국 중심고을 충주의 지명이 어떻게 변해왔는지 알아볼까요?

국원성

지금으로부터 1640여년 전, 고구려의 광개토대왕이 백제를 몰아내고 충주지역 일원을 차지하게 됩니다.
충주를 지배하게 된 고구려는 충주를 '국원성(國原城)'이라고 불렀어요. 국원이라는 말은 '나라의 근원이 되는 땅'또는'나라의처음,본디가 되는 땅'이라는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고구려가 충주를 지배한 기간은 550년경 신라의 진흥왕에 의해 완전히 복속되기까지 약 150여년 정도인데요,고구려는 이 기간 동안 고구려 영토의 경계를 표시하기 위해 가금며 지역에 충주 고구려비를 세우기도 했죠.

중원경

고구려 뒤를 이어 충주를 지배하게 된 신라는 충주를 '국원소경'으로 승격시키고, 귀족의 자제와 6부의 부유한 백성들을 이 곳에 살게 하였습니다.
그러다 신라 경덕왕 16년(757년)에 이르자 이름을'중원경(中原京)'이라 바꾸었어요.중원이라는 말은 '나라의 가운데'또는'중앙에 있는 넓은 들판'이라는 의미를 갖습니다.

충주

충주는 고려를 건국한 태조 왕건이 후삼국을 통일한 후 태조 23년(940년대)에 이르러 비로소 충주는'충주(忠州)'라는 명칭으로 불리게 되었어요.
충주라는 이름은 이 곳의 인사들이 태조 왕건의 편에 서서 고려를 건국하고 후삼국을 통일하는 과정에서 변함없는 충성을 바치고 큰 공헌을 세운 것을 기리는 의미로 특별히 내린 명칭이라고 합니다.

별칭

대원

충주는 고려 성종때 '충주'라는 명칭 대신'대원(大原)'이라는 별칭으로 불리기도 했어요. 이 별칭은 충주가 태조 이래 고려 왕실의 중요한 기반이 된 대표적인 도시라는 점과 함께 광종과 정종의 외가가 있는 곳이라는 점에서 볼 때, 고려의 주요한 지역으로서 충분한 조건을 갖춘 지역임을 강조하여 내린 호칭으로 볼 수 있습니다.

예성

예성(蘂城)은 고려시대 때 대몽항쟁의 공적과 관련된 것으로 보이는 별칭입니다. 고려 충렬왕대에 국원성을 개축하면서 성벽과 초석에 연꽃을 조각하였던 것에서'예성'이란 호칭이 시작되었다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이후부터 충주라는 공식 명칭과 함께 예성이라는 별칭으로도 불렸어요. '예성'의 예(蘂)자는 꽃술이라는 뜻으로,쉽게 말하면 꽃잎 중간에 있는 수술을 뜻하는 말입니다.여기에는 우리는 충주가 우리나라의 '중심고을'이라는 뜻을 내포하고 있다는 사실을 생각해 볼 수 있어요. 예성이라는 명칭은 현재까지도 충주의 학교나 단체 들의 이름에 많이 사용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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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담당부서 문화예술과
  • 전화번호 043-850-5984
  • 최종수정일 2017.08.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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